옷장을 열면 검정 티셔츠 열두 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같은 브랜드, 같은 사이즈, 같은 목 모양. 검정 바지 네 벌, 검정 스니커즈 두 켤레. 아침마다 고를 필요가 없어서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스티브 잡스도 그랬다니까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습니다. 하루에 컬러칩을 수백 장 봅니다. 클라이언트 브랜드의 핑크가 너무 차갑지 않은지, 이 초록이 로고와 싸우지 않는지. 남의 색을 보느라 내 색은 검정으로 비워둔 거였어요. 그때는 그게 프로의 태도인 줄 알았습니다.
2024년 3월 어느 회의. 제가 고른 시안을 설명하면서 "이 컬러 예쁘죠?"라고 했는데, 말하면서 알았어요. 저는 그게 예쁜지 몰랐습니다. 데이터로는 맞는 색이었어요. 트렌드 리포트에도 있고, 경쟁사 분석에도 맞고. 그런데 제 눈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어요.
예쁜 걸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능력이 사라졌다.
디자이너한테 그건 끝이다.
그 주에 사표를 냈습니다. 극적인 결심은 아니었고, 그냥 더는 못 하겠다는 걸 인정한 거예요. 퇴직금으로 제주에 한 달 방을 얻었습니다.
제주에서 매일 숲길을 걸었어요. 사려니숲, 곶자왈, 이름 모르는 오름. 검정 티셔츠를 입고요. 어느 날 숲 한가운데서 사진을 찍었는데, 초록 사이에 검은 덩어리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저였어요. 나무도 풀도 이끼도 전부 색이 있는데, 저만 그림자였습니다.

제주에서 돌아와 외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옷장 정리를 도와드리는데, 맨 안쪽에 70년대 레이스 원피스가 있었어요. 할머니가 결혼 전에 입으셨다는 옷. "네가 입어라." 입고 마당에 나갔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예뻐졌어요. 옷이 예쁜 게 아니라 기분이요.
8개월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예쁘다는 감각이 돌아온 게. 그날 저녁에 그 원피스 입은 사진을 올렸고, 다음 날 아침 DM이 서른 개 와 있었어요. "어디서 샀어요?" 파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팔게 됐어요.
검정 티셔츠는 세 장 남겼습니다. 나머지 자리는 레이스와 잔꽃과 뜨개가 채우고 있어요. 아침에 고르는 데 10분 걸립니다. 그 10분이 하루 중 제일 좋은 시간이 됐어요.
수업용 데모. 결제는 실제 스토어에서 이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