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TONE — 피부톤에서 시작하는 선케어

47번째 제형 테스트에서 배운 것

김샌디 · 샌드톤 대표 브랜드 · 6분 읽기

창고를 정리하다가 상자 하나를 열었습니다. 라벨에 매직으로 번호만 적힌 튜브 46개. 샌드톤이 나오기 전에 죽은 시제품들입니다. 버리려고 꺼냈다가, 결국 하나씩 손등에 발라보며 오후를 다 썼습니다. 이 글은 그 상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왜 46번이나 실패했나요?

선크림 제형은 삼각형입니다. 꼭짓점이 세 개예요. 차단력, 발림성, 톤. 문제는 셋이 서로 당긴다는 겁니다. 차단력을 올리려고 미네랄 필터를 늘리면 제형이 무거워져 발림성이 죽습니다. 발림성을 살리려고 오일을 늘리면 톤이 탁해집니다. 톤을 맑게 잡으면 이번엔 차단력이 흔들리고요. 하나를 당기면 둘이 무너지는 게임을 2년 동안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실패 몇 개만 꺼내 보면:

  • 3번. 색은 지금 제품보다 예뻤습니다. 발라보면 두 시간 만에 코 옆부터 밀렸습니다. 색을 사랑해서 일주일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일주일이 아깝습니다.
  • 19번. 차단력과 발림성을 처음으로 같이 잡은 버전. 그런데 각질이 있는 자리마다 베이지가 끼어서, 오후가 되면 얼굴에 등고선이 생겼습니다.
  • 31번. 가장 힘들었던 번호. 실험실 조명 아래선 완벽했는데 한낮의 햇빛 아래서 회색이 돌았습니다. 이날 처음으로 '회사 말이 맞았나' 하고 적어놨더군요.
  • 40번대. 실패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안 된다"가 아니라 "2% 모자라다"의 연속. 사실 이때가 제일 위험했습니다. 40번쯤 되면 '이 정도면 됐지'라는 목소리가 매일 찾아옵니다.

그럼 47번째는 뭐가 달랐나요?

재료가 아니라 순서였습니다. 46번까지 저는 흰색 필터로 제형을 완성한 뒤 마지막에 색을 얹었습니다. 회사에서 8년 동안 하던 방식 그대로요. 47번째는 반대로 갔습니다. 필터 입자에 베이지 코팅을 먼저 입히고, 그 색이 살아남도록 나머지 제형을 역으로 설계했습니다. 색을 마지막에 더하는 게 아니라, 색에서 출발해서 제형을 짓는 것.

46번의 실패 이유는 전부 달랐지만, 통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순서를 뒤집은 것.

발라본 날이 기억납니다. 티가 안 나서 오히려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하얗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고, 그냥 제 피부가 조금 정돈된 얼굴. 46개의 튜브가 있었기 때문에 그게 성공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작게 만드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것

혼자 뭔가를 만들고 있는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상자에서 배운 것 세 가지를 남깁니다.

  1. 실패에 번호를 붙이세요. "또 안 됐다"는 기록이 아니지만 "31번은 햇빛 아래서 회색"은 기록입니다. 번호가 쌓이면 실패가 데이터가 됩니다.
  2. '이 정도면 됐지'가 들리면 아직 아닙니다. 저는 그 목소리를 40번부터 들었고, 무시한 덕에 47번을 만났습니다.
  3. 막히면 재료 말고 순서를 의심하세요. 46번의 저는 재료만 바꿨습니다. 답은 공정의 방향에 있었습니다.

그 47번째가 어떤 제품이 됐는지는 여기에, 제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는 내 소개에 적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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